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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행한 건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다

• 글쓴이: 경제지식네트워크  
• 작성일: 2019.08.30  
• 조회: 320

Capitalism Isn’t the Reason We’re unhappy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중에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전 세계에서 빈곤이 감소되는 명백한 증거들이 눈 앞에 드러나면서 자본주의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경제적 논쟁에서 시장은 승기를 잡았다.


그러자 광신적인 반(反) 자본주의자들은 다른 전략을 도입하였다. 이제는 자본주의가 여타 사회, 생태, 심리적 병폐의 주 원인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어쩔 땐, 자본주의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가, 또 어쩔 때는 자본주의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긴 했어도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자면, 가디언(The Guardian) 지(紙)의 칼럼니스트, 조지 몬비어트(George Monbiot)는 친(親)자본주의 이념이 사람들을 슬프고, 외롭고, 병들게 만든다고 비난한다. 자본주의가 더 많이 발달하여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보다 더 우울하다는 여론조사를 인용한다.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지(紙)의 홀리 백스터(Holly Baxter)는 지금 노인들이 정말 외롭고 소외되는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때문에 우리는 소외되고 죽음을 눈 앞에 둔 친척을 방문하기보다는 물건들을 사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 자본주의는 우리가 우울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자가 되길 원한다


이 모든 것은 의도된 것 같다. 몬비어트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비평가들 – 그들은 시장 제도와 유사한 것을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 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념은 우리들을 고립시켜서 영혼 없는 소비자로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한없이 비참하여져서 소비를 지속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러한 생각을 좀 더 학문적으로 설명한 것이 안키타 싱(Ankita Singh)의 ‘자본주의, 소비지상주의, 대중 문화(Capitalism, Consumerism, and Popular Culture)’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절망의 하강 사이클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이렇게 끈질긴 불행은 “오늘날 도시 기업 문화에서 느끼게 되는 소외감에서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자본주의가 야기한 “공허감”을 “보상받고자” “소비지상주의 문화가 제공하는 무생물에 탐닉”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에게 어떤 상품을 사야 할 지 말해주는 것이다. 싱은 “광고의 힘이 너무나 지대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수요를 창출하고 필요치도 않는 일상용품을 만들어 내니” 자본주의자들에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개념의 상당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자인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 Fromm)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에서 말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제 활동, 성공, 물질적 이득,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자신의 행복이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경제 체제의 성장에 기여하고 자본을 축척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사람의 운명이 된다.”


즉, 자본주의와 그의 선전원들 (예컨대, 광고업자들)을 통해 인간 존재는 “거대한 경제 기계의 톱니”로 전락하여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그저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쓰여질 뿐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 자본주의 경제는 무한한 소비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 광고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되질 않는다. 자본주의는 소비지상주의를 유발하지 않는다. 우선, 자본주의 제도가 소비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거나 항상 더 많은 소비재를 사기 위해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수 밖에 없다는 말들은 사실이 아니다. 소비지상주의와는 거리가 먼 구두쇠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정당한 이유다. 문학 작품에서 전형적인 구두쇠로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이 좋은 예다. 자본주의에서 소비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소비를 나중으로 미루는 저축이다. 항상 어디서나 소비를 최대한 늘리려는 것은 정부와 중앙 은행이지 시장이 아니다.


게다가, 저축과 투자는 임금을 늘리고 자본을 축척하며 미래의 소비를 증가시키는데 핵심 요소들이다. 시장 경제에서 많은 기업들은 퇴직 기금이나 은행과 마찬가지로 더 많은 저축과 투자를 통해 곧바로 수익을 올린다. 마지막 현찰을 탈탈 털어 자질구레한 싸구려 장신구를 사는 것은 건전한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 광고업자들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방법


자본주의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이론을 열심히 퍼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집할 수 있다. “맞아요,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에게 무조건 소비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장난감 판매자나 자동차 제조업자와 같은 자본주의 제도의 한 부분은 우리의 소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지갑을 열도록 광고를 이용하죠. 쇼핑몰에 한 번만 더 간다면 우리 영혼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게 만들어진 광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진실은 아주 조금만 있을 뿐이다. 많은 자본주의자들이 우리가 소비재를 사길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소비자 개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지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쓰길 바라면서 광고를 한다. 그리고 광고는 우리가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뭔가 부족한 느낌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런 류의 광고는 일찍이 19세기 초에 발달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은 1920년대였다.


전형적인 틀은 이런 식이다.

  • 왜 못생긴 채로 방치하죠? 지니스 콜드 크림을 바를 수 있는데……

  • 왜 뚱뚱한 채로 포기하죠? 애크미 다이어트 약을 먹을 수 있는데……


이런 식의 광고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하도 많이 나오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런 농담을 했다. “미국 광고계에서 가장 대담하면서도 성공적인 광고를 만들려면 “왜 그냥 살고 있는 거죠? 단돈 10달러면 땅에 묻힐 수 있는데……”라는 문구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광고들은 이런 방식이라기 보다는 좀 더 미묘하고 암시적이다. 현대 광고는 자주유머에 호소한다. 그렇지만, 현대 광고 역시 자기 향상의 일환으로 소비를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더 멋진 외모, 더 고급스러운 자동차, 더 만족스러운 우정이 있는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바로 이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한다면 당신이 가질 수도 있을 지 모르는 삶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광고를 그대로 믿을까?


사람들이 광고가 말하는 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만약 광고대로 소비한다면,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말한 대로 촛불 제조업자는 약간의 광고만으로도 우리가 전구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광고의 효과를 밝히기 위한 연구들은 확실한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931년 소비자 연구가 밝힌 바로는, “대중의 5%만이 터무니 없는 광고들을 무조건 믿었다.” 어쨌든 광고를 믿는 사람은 37%에 불과했다.


2013년 설문 조사에서 “광고가 어느 정도 정확하다”고 동의한 소비자는 21%뿐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브랜드 광고 때문에 상품 구매를 하지 않겠다”는 소비자도 21%였다. 이것은 설문 조사 자료에 불과하니 의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는 광고가 부지기수다. 2015년 텍사스 대학 연구에 따르면, 주류 광고는 지난 40년간 400% 늘어났다. 반면, 일인당 주류 소비량은 감소하였다. 물론, 광고가 어떤 특정한 브랜드를 홍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전반적인 소비를 늘리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자본주의자들이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그리고 광고를 그대로 믿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자본주의”가 우리를 비참한 소비자로 전락시켜 극악무도한 계획을 성공시키고 우리의 외로움을 극대화하여 또 다시 정신 없이 돈을 쓰게 만들었는지 알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선조들보다 더 비참한가?


자본주의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이야기 속의 추론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데도, 지속적으로 많은 이들이 나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사람들이 더 행복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더 손쉬운 삶을 살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할 통계 자료는 없는 게 확실하다. 우리가 때로 대중 매체를 통해 듣고 볼 수 있는 행복 측정이란 것은 대개 완전히 주관적으로 자가 보고된 연구 자료에 기반하며 현재를 과거와 비교할 만한 수단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행복”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실상 전무했다.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 예를 들어 근로시간, 거주 공간, 기대 수명, 자살률과 같은 것들로 과거의 삶을 재구성해 보면 우리 조부모님, 혹은 증조부님 세대가 그리 특별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대량 마케팅과 대량 소비라는 현대적 방법이 등장하기 이전 세대인 19세기는 단 하루도 근로와 노역 없이 속 편히 지낼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다. “좋았던 옛 시절”의 가난은 결코 개인의 실현과 만족의 원천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면 과거를 더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는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이전, 상상 속의 황금기를 말한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인이 행복하고 농부가 행복한” 시대였다. 그들은 “소속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삶의 위치”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 그 누구도 새 차를 사야 하나, 새 침실 가구 세트를 사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광고나 자본주의를 전혀 접할 수 없는 빈곤 속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의 열쇠였을까? 이에 대해 로스바드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만약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길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옛적 유토피아나 히피들처럼 공동체에서 소위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행복하고 통합된, 그러나 가난이 고착화 된 삶으로 돌아가고자 현대 사회를 포기한 사람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동안 이러저러한 모양의 이상 공동체를 시도했던 몇 안 되는 지식인들 조차도 그 시도를 재빨리 포기했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에서 한 발 물러서기는커녕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은 현대의 “소외된” 매스컴을 이용하여 현대 사회를 깎아 내리는 바로 그 비평가들이다.”


인간이 불행, 공허, 부족을 느끼며 고통 받지 않았던 시대나 장소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러나 그런 곳이 언제, 어디에 존재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반면, 몸소 살펴보고자 현대의 편의시설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할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글은 https://mises.org/wire/capitalism-isnt-reason-were-unhappy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저자 Ryan McMaken,


역자 전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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